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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소개
위로 가기일반적으로 바위면에 새긴 부처님을 마애불(磨崖佛)이라 하며 삼국시대부터 꾸준히 시대를 달리하며 만들어졌다. 마애불의 경우 바위의 한 면만을 대상으로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나 대승사 사면석불은 사방(四方)으로 돌아가며 불상을 새긴 매우 드문 경우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사방불(四面石佛)은 모두 3기로서 경주 굴불사지 석불상, 충남 예산의 예산화전리 사면석불, 이곳에 문경 사불산 중턱에 있는 사면석불이다.
이렇게 보면 사불산 중턱에 있는 사면석불은 역사상 기록으로 볼 때 진평왕때의 일이니 100여년 뒤인 경덕왕 때로 기록된 경주의 굴불사지 사면석불보다는 빠른 양식에 속한다. 그러나 충남 예산의 예산화전리 사면석불의 경우 양식상 백제계열인 관계로 신라지역의 사불상과 그 시기를 논하기는 쉬운 일은 아니라고 본다.
사방불은 남아 있는 수량으로 보아도 매우 희귀할 뿐만 아니라 건립의도 또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직까지 학술적으로 뚜렷하게 밝혀진 결과는 없지만 원래 동서남북 사면에 불상을 조각하는 것은 사방정토(四方淨土)를 상징하는 것이어서, 대승불교(大乘佛敎)의 발달과 더불어 성행한 사방불 신앙의 한 형태로도 보고 있으며 밀교(密敎)의 오방불(五方佛)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사방불 사면에 어떤 부처를 모시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신라의 사방불은 경주와 문경을 예로 살펴보았을 때 대체로 서방에 아미타불과 동방에 약사여래, 남쪽에 석가모니불, 북쪽에 미륵불을 모신다.
여하간 예산의 백제계열 사면불을 제외하면 문경의 사면석불은 신라계열 중 가장 오래된 역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후에 경주 소금강산 굴불사 사면석불로 이어지는 사면석불의 초기 모습으로 보고 있다.
대승사 사면석불은 불상이 새겨진 각 면은 정확히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으며 사면에는 모두 불상 1구씩이 새겨져 있다. 불상은 높이 약 295㎝, 너비 약 150㎝로서 커다란 돌기둥에 새겨진 사방불로서 전체적으로 훼손이 심하여 세부 문양을 파악하기 어려우나 모두 여래상인 것으로 보인다. 동쪽과 서쪽은 좌상(坐像)이고 남쪽과 북쪽은 입상(立像)으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 동쪽의 좌상은 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대승사 사면석불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보각국사 일연(一然, 1206~1289)스님 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 충렬왕 7년<1281>에 군위 인각사(麟角寺)에서 편찬한 삼국 시대의 역사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원문을 살펴보면, 三國遺事 券二 塔像 題四 四佛山, 掘佛山, 萬佛山 條
竹嶺東百許里, 有山屹然高峙, 眞平王九年甲申, 忽有一大石,
四面方丈, 彫四方如來, 皆以紅紗護之, 自天墜其山頂. 王聞之, 命駕
瞻敬, 遂創寺 側, 額曰大乘寺. 請比丘亡名, 誦蓮經者主寺, 掃供石,
香火不廢, 號曰亦德山, 或曰四佛山. 比丘卒旣葬, 塚上生蓮
일연의『삼국유사』“권2, 탑상제4, 사불산·굴불산·만불산 조”에 의하면 “죽령 동쪽 백리쯤 되는 곳에 우뚝 솟은 높은 산이 있는데, 진평왕 9년(587) 갑신甲申에 갑자기 사면이 한 길이나 되는 큰 돌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사방여래의 불상을 새기고 모두 붉은 비단으로 싸여 있었는데 하늘에서 그 산마루에 떨어진 것이다. 왕(진평왕)이 이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그 돌을 쳐다보고 나서 드디어 그 바위 곁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대승사라고 했다. 여기에 이름은 전하지 않으나 연경(妙法華經, 또는 法華經)을 외는 중을 청해다가 이 절을 맡겨 공석을 깨끗이 쓸고 향화를 끊이지 않았다. 그 산을 역덕산(亦德山)이라 하고 혹은 사불산(四佛山)이라고도 한다. 그 절의 중이 죽어 장사지냈더니 무덤 위에서 연꽃이 피었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만으로 볼 때 진평왕 9년은 정미(丁未)년인 587년이고, 갑신(甲申)은 진평왕 46년 (624)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사면석불이 세워진 시기에 논란이 있다. 그러나 진평왕 9년이라는 구체적인 시기의 거론과 당시 갑신년에 일어난 백제와의 긴박한 영토분쟁 관계를 놓고 보았을 때 정미년을 갑신년으로 표기상 오기(誤記)했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또 다른 문제점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내용과 차이를 보이는 점은 이곳의 위치가 죽령 동쪽 100리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죽령 서쪽 100리에 가깝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점은 기록 당시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인각사(麟角寺)가 군위에 있다보니 방향성에 대한 문제를 단순하게 생각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여하간 사면석불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 위치가 교통로 상에서 죽령, 계립령과 가까우며 신라와 백제가 영토분쟁을 자주 일으켰던 곳이므로 국토의 수호를 위해 이곳이 신라의 영토임을 종교의 힘으로 알리려는 호국적 측면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때늦은 감은 있지만 문경대승사 사면석불은 지난 2007년 12월 31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